메타버스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다. 현대에 버추얼 리얼리티는 '가상현실(VR)'이라는 특정한 기술로 정의되고 있다.
즉 '컴퓨터를 통해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기술'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본래의 의미는 이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고 광범위하다.
역사 속에서 많은 철학자가 버추얼 리얼리티, 가상성, 가상공간에 깊은 관심을 두고 그 개념을 꾸준히 정의해왔다. 이러한 철학적 고찰은 현대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버추얼(virtual)'은 가능성, 잠재성이라는 의미의 중세 라틴어 'Virtualis'에서 비롯된 단어다. 실현될 가능성은 존재하나 아직 현실에서 발생하지는 않음을 뜻하는 개념이다. 잠재성 역시 비슷한 개념으로, 겉으로 표출되지 않고 숨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고 공기의 습도가 높으면 우리는 보통 비가 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현재는 비가 오지 않으나 '잠재된' 비가 곧 내릴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과 잠재성이 있는 가상성의 개념이 실제 현실과 같이 구체화하고 실체화된 상태를 '버추얼 리얼리티'라고 한다. 그래서 버추얼 리얼리티는 인류의 문명과 기술 발전의 정도에 따라 구현하는 도구가 달라질 수 있다. 글이나 그림, 건축을 활용할 수도 있고, 오늘날과 같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도 있다.
◇ 버추얼의 개념과 시뮬라크르, 진짜를 뛰어넘는 가짜
고대 그리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도 존재했던 버추얼의 개념은 현대에 와서 질 들뢰즈(Gille Deleuze), 베르그송, 장 보드리야르 등 프랑스 철학자가 더욱 깊이 다뤘다.
질 들뢰즈는 버추얼리티의 개념을 잘 정의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들뢰즈는 버추얼이 '실제로 구체화하기 이전의 상태로, 실제화될 가능성이 내포된 개념적 상태'이며,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으나 실재하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잠재적이고 가상스러운 의미로 실재하며 현실에서의 존재(existence)만이 충족되지 않은 것'이며,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지속해 구체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즉, 버추얼은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할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진 상태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소즘'(Le Bergsonisme)에서도 버추얼리티와 액추얼리티(actuality)를 '현실에 존재하는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가'라는 존재의 대립적 의미로 구분하며, 결국에는 두 개념 모두가 리얼리티 (reality)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철학자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는 버추얼을 다른 방식으로 정리했다. 마수미는 '가상계'(Parables for the virtual)에서 가상 (virtual)은 우리의 감각만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오직 그 결과물의 효과와 영향력으로만 느낄 수 있다고 정의했다. 그는 토폴로지(topology) 형태를 사용해 가상(virtual)을 설명했는데, 이 경우 모든 변환의 순간에 만들어진 결과물이 꾸준하게 중첩돼 가상적 이미지나 형태가 생성된다고 봤다.
이러한 가상의 성질은 일반적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고 적절하게 도표화나 도식화하기 힘들지만, 상상과 감각 속에서는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출신 작가이자 사회학 교수인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 가상과 실체의 관계를 통찰력 있게 정리했다.
시뮬라크르(Simulacres)와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시뮬레이션(Simulation)이라는 단어에서 확장된 개념으로,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대체물'이라고 정의했다.
모방은 현실에서 실재하는 것을 흉내 내거나 복제하는 것이지만, 시뮬라크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보드리야르가 주장하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이 잘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 '매트릭스'에서 펼쳐지는 가상 세계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릴리 워쇼스키(Lilly Wachowski)와 라나 워쇼스키(Lana Wachowski) 자매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영감을 받아 1999년에 영화 '매트릭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디지털 기기가 만들어낸 허구의 가상 세계 매트릭스를 실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세상은 가상의 세계에 플러그인하기 위한 거대한 장치이며, 인간은 가상의 세계인 매트릭스 안에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생생하게 구현한다. 비록 영화지만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허상인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에서 시뮬라크르는 현실을 대체하기도 하고, 현실이 오히려 시뮬라크르의 이미지를 따르게 되는 주객전도의 상황도 벌어진다고 했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의 실재를 지배하는 존재인 시뮬라크르의 대표적 사례로 미키 마우스와 디즈니랜드를 꼽았다.
보드리야르의 주장에 따르면, 미키 마우스는 쥐를 모델로 창작한 캐릭터지만 결코 단순한 쥐가 아니다. 인간처럼 두 발로 걷고 말하는 새로운 가상적 존재이며, 원래 복제의 대상이었던 현실 세계의 더럽고 혐오스러운 쥐와는 완전히 다르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됐다. 미키 마우스는 전 세계 어린이들의 최고의 친구로 자리 잡았고, 어른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일으키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다.
'쥐'라는 대상이 완전히 다른 성질의 복제물인 '미키 마우스'라는 시뮬라크르가 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어떤 대상을 모델로 만든 가상물이 원본과의 연관성은 잃어버리고, 원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디즈니랜드도 마찬가지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가 '현실을 위장한 허상의 복제물이 만든 세상'에 불과하며, 이러한 허상의 세상을 통해 인간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조종한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미국 사회 전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와 같이 모든 분야가 허상의 가치를 생산하고 판매하며, 사람들이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미지나 가치에 빠져들게 조장한다며 현대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했다.
◇ 원본과 복제물의 역학 관계
버추얼과 버추얼 리얼리티에 관한 현대 철학자들의 정의와 주장을 통해 우리는 미래 메타버스에 필요한 중요한 통찰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통해 메타버스의 개념과 정의, 메타버스를 구현하는 방법론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실질적 결과물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특히 보드리야르가 주장한 것처럼 미래의 메타버스 세상도 수많은 디지털 복제물이 만드는 가상의 세상이기에 여기서 논의된 가상물과 현실의 개체, 원본과 복제물의 역학 관계도 살펴보아야 한다.
원본과 복제물의 역학 관계는 서양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다뤄져 온 주제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세계를 3개의 등급으로 구분했는데, 가장 상위의 세계는 모든 사물의 본질이자 원본이 존재하는 형이상학 세계인 '이데아'(idea)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세상은 이러한 원본을 복제한 것이다. 가장 하위 단계는 원본을 복제한 현실을 다시 복제한, 즉 예술품과 같이 복제물(현실)을 복제한 시뮬라크르다.
플라톤의 철학과 세계관은 후대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다가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이후에 큰 변화를 겪는다. 이 시기에는 과학적 사고의 전환으로 복제물을 최대한 원본과 가깝게 표현하고자 했다. 당시 예술가들이 창작한 회화나 조각 등의 표현 방식, 과학자와 탐험가들이 활용한 동식물의 그림 자료와 별자리 자료를 보면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그리려고 노력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기에 복제물은 원본과 비슷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본과 복제물의 역학 관계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더 크게 변화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에서는 복제물이 원본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주장했다. 과학기술과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로 여러 종류의 미디어가 발전하고 실제보다 더 뛰어난 이미지의 광고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기존 미디어에 더해 여러 소셜 네트워크와 메타버스까지 등장해 이러한 복제물의 시뮬라크르는 더욱 다양한 형태로 넘쳐나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시뮬라크르는 이미지, 동영상, 아바타, 홀로그램 등의 형태로 탄생하고, 매우 촘촘한 네트워크 안에서 유통되며 소비되고 있다.
미래 메타버스 사회에서 형성될 원본과 복제물의 새로운 역학 관계는 양날의 칼처럼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마냥 반길 수도 무조건 부정할 수도 없는 변화에 현명하게 대처하려면 많은 질문과 고민을 통해 더 나은 길을 찾아가야 한다.
연합뉴스 / 이세영 기자, 김지선 기자
원문 : https://www.yna.co.kr/view/AKR20241105108300371?input=1195m